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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겐 ‘코미디언 출신 정치인’이라는 수식어가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17세 때 코미디 경연프로그램에 출연해 처음 얼굴을 알렸고, 프로그램 제작에도 직접 참여하는 등 예능인의 길을 걸었다. 그의 운명은 2015년 ‘국민의 종’(Servant of the People)이라는 제목의 TV 시리즈에 출연하면서 180도 달라졌다. 부패로 얼룩진 우크라이나 기득권 세력을 비판하는 역사교사가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는 다소 허무맹랑한 내용의 드라마 주인공을 맡아 인기를 얻었고, 이후 실제 정치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권유를 받았다. 손사래를 치던 젤렌스키 대통령은 결국 2018년 3월 그가 만든 프로덕션 ‘크바르탈 95’가 드라마 제목과 같은 이름의 ‘국민의 종’을 창당하며 현실 정치판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이듬해 4월 대선에서 부패 척결과 기득권 타파를 공약으로 내세워 ‘진짜’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중략)
◇방탄조끼 없이 전장에…불굴의 의지는 리더의 제1 덕목 =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된 2월 24일 전부터 도피설에 휩싸였다. 실제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젤렌스키 대통령과 그의 가족을 암살 1순위로 지목했고, 미국이 도피처를 제공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는 보도가 일제히 쏟아졌다. 하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쟁 발발 다음 날 페이스북에 참모들과 함께 수도 키이우(키예프)를 배경으로 찍은 영상을 올리며 도피설을 일축했다. 그는 영상에서 “나는 아직 여기(키이우)에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에 젤렌스키 대통령이 미국의 망명 제안을 거절했다는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 보도가 나오면서 젤렌스키 대통령의 리더십에 대한 우크라이나 안팎의 지지가 이어졌다. 지난해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을 점령할 당시 해외로 도망쳐 버린 아슈라프 가니 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과 비교되는 행보라는 평가도 나왔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방탄조끼나 헬멧 착용 없이 우크라이나 군복과 비슷한 색깔의 티셔츠 차림으로 키이우 시내를 둘러보는 모습을 자주 공개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젤렌스키 대통령을 처칠 전 총리와 비교하며 “러시아의 암살 위협에도 키이우에 남아 국민의 항전 의지를 일깨웠다”며 “찰리 채플린이 처칠로 변신했다”고 극찬했다. AFP통신도 영국 역사학자인 앤드루 로버츠 킹스칼리지런던대 전쟁학 교수의 말을 인용해 “젤렌스키 대통령은 처칠이 리더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여겼던 불굴의 의지를 지녔다”고 평가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 안팎에서 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용기 있는 리더십을 보여 준 공직자에게 수여되는 ‘케네디 용기상(Profile in Courage)’ 올해의 수상자로 선정됐다.
◇부족한 힘은 빌려 쓰는 실용주의 리더십 =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달 23일 키이우의 한 지하철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미국의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과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이 다음 날 키이우를 찾을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미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두 인사의 우크라이나 방문 사실을 밝히지 않은 상황에서 먼저 관련 내용을 공개해 버린 발언이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키이우를 찾는 첫 미국 최고위급 인사였다는 점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의 깜짝 발표는 외교적으로 이례적인 조치였다. 더 나아가 “이것은 큰 비밀이 아니다”라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조만간 키이우를 방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정부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회견과 관련해 “확인해 줄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해야 했다.
외신에선 젤렌스키 대통령이 미국을 겨냥해 “빈손으로 오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진 전략적인 행동이었다고 분석했다. 이후 젤렌스키 대통령은 블링컨·오스틴 장관과 키이우에서 90분간 회담했고, 7억1300만 달러(약 9100억 원) 상당의 추가 무기지원을 받아 내는 데 성공했다.
지난해 8월 미국·영국·독일 등 44개국의 고위 인사들을 키이우로 초청해 ‘크림 플랫폼’(Crimea Plat)이라는 이름의 국제회의를 출범시켰다. 가디언 등은 ‘크림 플랫폼’ 창설 이유는 2014년 러시아에 빼앗긴 크름(크림)반도를 되찾기 위해 서방의 힘을 빌리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의 앙숙으로 꼽히는 폴란드와도 러시아 견제를 목표로 손잡는 등 실용적인 리더십을 중요시한다.
◇14시간의 기자회견…소통의 대가 = 젤렌스키 대통령은 2019년 4월 대선에서 승리하자마자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탄핵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해 7월 25일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민주당 유력 대선주자였던 조 바이든 전 부통령(현 대통령)을 조사하라고 압력을 넣었다는 의혹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바이든 전 부통령의 아들이 이사로 있던 우크라이나 가스회사 ‘브리스마’가 우크라이나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었는데, 바이든 전 부통령이 우크라이나 측에 빅토르 쇼킨 검찰총장을 해임하지 않으면 10억 달러(1조2750억 원)에 달하는 미국의 대출 보증을 보류하겠다고 위협했다는 게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이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결국 2019년 10월 10일 키이우의 한 푸드코트에서 일명 ‘마라톤 기자간담회’를 개최했다. 기자간담회엔 내외신 기자 300명이 참석했고, 젤렌스키 대통령은 “어떤 질문이든 기꺼이 받겠다”고 공언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 영어를 섞어 가며 무려 14시간 동안 질문에 응했다. 이날 기자회견은 기네스북의 공인을 받지 못했지만, AFP통신 등은 “세계에서 가장 긴 기자회견 신기록이었다”고 보도했다. 성대 강화 주사까지 맞아 가며 기자회견을 준비했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일약 ‘소통의 대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우크라이나 사태 과정에서도 매일 유튜브와 트위터 등을 통해 전황을 설명하고, 국제사회의 도움을 요청하는 등 활발한 소통을 이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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