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 대공분실 고문 피해실태 첫 번째 보고서 발간, 1976년부터 2005년까지 발생한 고문실태 일목요연하게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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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 피해실태 첫 번째 보고서 발간, 1976년부터 2005년까지 발생한 고문실태 일목요연하게 정리

권경욱 기자 0   0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 피해실태에 관한 첫 번째 보고서가 나왔다.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실태 조사연구 보고서는 6·10민주항쟁 31주년을 맞아 문재인 대통령이 옛 남영동 대공분실 터에 ‘민주인권기념관’ 건립을 공표한 데 따른 것으로, 민주인권기념관 건립을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작업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일어난 고문 사건의 구체적인 실체 파악을 목표로 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오래 전부터 국회 및 유관 기관을 통해 남영동 고문피해 자료를 입수하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문서 보존연한 경과 등을 이유로 번번이 실패했다. 이에 전문연구기관인 ‘재단법인 진실의 힘’에 기초 실태조사를 의뢰했고, 그 결과 지금까지 정리된 바 없는 1976년부터 2005년까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발생한 고문실태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것이다. 


보고서는 남영동 대공분실에 체포되어 수사를 받은 피해자 명단을 담고 있다. 이제까지 남영동 대공분실이 체포, 구속 수사한 정확한 인원은 공개된 바 없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공식명칭은 물론 소속, 조직체계, 종사자 현황 등 운영 전반이나 법적 근거를 비밀리에 운영해왔기 때문이다. 경찰과 검찰 등 유관 기관의 자료가 전무한 상태에서 수십 년 전 신문기사와 잡지, 논문, 유인물 등 수많은 자료를 일일이 뒤져가며 파악한 인원은 384명이다. 또한 법정진술, 가족 수기, 성명서, 호소문, 항소이유서, 고소장 등을 통해 고문피해자 54명의 육성 증언을 요약했다. 특히 고문 피해자 8인에 대한 심층 인터뷰를 진행, 고문피해 사실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밝혔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최초로 체포한 이는 리영희다. 리영희는 중국사회의 실상을 소개한 책 8억인과의 대화(창작과 비평사) 등이 문제가 되어 1977년 11월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1980년 신군부 집권과 더불어 남영동 대공분실이 맨 먼저 시작한 일은 언론인을 대거 체포, 수사한 것이다. 신군부는 비상계엄 상황에서 반독재 민주화운동 보도를 못하도록 언론사에 대한 검열을 강화했다. 1980년 기자협회 집단구속 사건을 시작으로 같은 해 경향신문 사건, 조선·동아 투위 사건, 1986년 보도지침 사건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에 연행된 기자의 숫자는 최소 26명으로 파악되었다.



옛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의 현재 모습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은 일상적으로 자행된 것이었음을 밝혀낼 증언들을 수집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피해자들의 나이, 성별, 직업, 사건의 경중과 관계없이 물고문을 자행했고, 일종의 통과의례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이미 예견된 필연적 결과였다. 그 외에도 잠 안 재우기, 구타, 볼펜 고문, 관절 뽑기, 통닭구이, 물고문, 전기고문, 협박, 밥 굶기기, 심리 고문이 자행됐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자행된 고문 수사로 여러 사람이 죽었다. 대공 수사관들은 40여 일 넘게 고문을 통해 허위사실들을 짜 맞춰 가족을 통째로 간첩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피해자들은 사형 집행을 비롯해 고문으로 인한 사망, 10년 이상 장기간 구금, 고문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이처럼 남영동 대공분실은 재판이라는 합법적 방식의 탈을 쓰고서, 수많은 죽음을 만들어냈다. 죽음은 피했으나, 간첩으로 낙인찍힌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2010년 이후 열린 재심재판에서 남영동 대공분실이 불법감금, 고문수사를 통해 얻어낸 허위자백으로 인한 조작사건이라는 무죄판결을 얻어냈다. 


보고서는 대공 사건에 집중된 특진과 격려금이 수사관들에게 있어 불법 고문 수사를 이어가는 큰 이유로 작용했음을 확인했다.


고문 피해자가 기억하는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도 낱낱이 분석했다. 육중한 철문, 층수를 알 수 없도록 5층 수사실과 연결된 철제계단, 5층이지만 지하처럼 어둡고 긴 복도, 엇갈려 설계된 취조실 구조, 환기창 크기의 좁은 창문, 고정된 의자와 책상, 안에서 열 수 없도록 설계된 문, 소리가 차단된 방음벽 등 건물 그 자체가 거대한 고문실이었다. 특히 욕조와 칠성판은 오로지 고문만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였다. 피해자들은 수년이 지났어도 남영동 대공분실을 떠올리면 “몸에 고문당한 자국 하나하나가 반응”한다고 증언했다. 


한편 이번 발간된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실태 조사연구 보고서는 총 341쪽의 분량으로, 민주주의의 역사적 시간과 공간을 되살림과 동시에 폭압적인 공안 정권이 사라진 2018년 오늘날 다시금 남영동 대공분실과 마주해야 하는 이유를 묻고 답한다. 하지만 이번 조사는 한정된 문헌 자료와 피해자 증언에 기초한 것으로, 완성이 아닌 1차 기초 조사의 결과물이다. 사업회는 고문피해자나 가족, 지인들의 제보를 기다리고 있으며, 더 많은 문헌과 기록, 증언을 수집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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